[웬슬]레이디메이드 인생

2018. 5. 23. 00:55









레이디메이드 인생


Wendy X Seulgi


자허토르테









"승완아 방과 후 뭐 들을 거야?"

 

 

 

아직 이파리가 돋지도 않은 추운 날씨였다. 학교에 다닌 지 이제 1년 된 둘은 한겨울차림으로 꽁꽁 싸맨 채 이젠 익숙해진 하굣길을 걷고 있었다.

 

 

 

"음 사물놀이 재밌겠다,"

"그거 엄청 힘들대."

"징은 재밌을 것같아."

"음 근데 이거 3학년부터래."

 

 

 

슬기의 말을 듣자 승완은 가방에서 인쇄된 방과후 개설안내문을 꺼내 찬찬히 살펴보았다.

 

 

 

"유현이랑 성희는 실험교실 들어갔대. 거기 갈까?"

"음 일단 엄마한테 물어봐야하니까."

"아 벌써 집 앞이야. 암튼 뭐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내일 알려줘."

"응 내일봐."

 

 

 

승완은 가면서 다시 프린트를 보고 있었다.

 

 

 

"손승완 너 그러다 자빠진다,"

"아니거든."

 

 

 

승완이 고개를 훽 돌리자 슬기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후다닥 뛰었다. 다음날 슬기가 등교할 때 승완의 작은 뒤통수를 보았다.

 

 

 

"승완아 같이 가자."

 

 

 

슬기는 승완에게 뛰어가며 말했다. 슬기가 옆에서 같이 걷자 승완은 입을 오물거리다가 말했다.

 

 

 

"슬기야 나 야구부 들어가려고."

"그거 여자는 안넣어주지않아?"

"엥 그런 거 안 써져 있었어."

"엄마아빠도 된대?"

". 너는 실험교실할거야?"

"아니 그냥 안 할래."

 

 

 

슬기는 솔직히 실험교실이고 나발이고 상관없었다. 그저 승완과 같이하고 싶었다. 티비에서 아빠가 보는 걸 옆에서 보면 정말 재미없어보였다. 차라리 축구는 공차서 넣는 거지. 뭐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야구부 선배들은 늘 냄새나는 유니폼을 등교할 때부터 입고 다녔다. 흙먼지를 잔뜩 묻힌 환타 같은 유니폼을 승완이 입고 있는 게 상상이 안 갔다.

 

 

 

*

 

 

 

슬기의 염려와 다르게 승완은 야구부에 들어가서 냄새나는 유니폼을 입고 있진 않았다. 가끔씩 흙먼지는 묻혔지만 말이다. 하지만 슬기는 반 친구들이랑 같이 하교할 때마다 승완과 같이 다녔던 그 짤막한 하굣길이 조금 그리웠다. 일 년 정도 지나 하굣길은 금세 익숙해졌고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승완은 꽤 번듯한 야구선수 같았다. 슬기는 승완과 예전처럼 매일 놀진 못했지만 가끔씩 쉬는 날 놀 수 있었다. 승완은 자기가 감독님한테 뭘 배웠고 어떤 재미난 걸 하는지 얘기했다. 사실 슬기는 하나도 재밌지 않았다. 그래도 승완이 뭐 하나에 꽂힌걸 보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지내다 한번은 오랜만에 승완이 슬기네 집에 왔던 적이 있었다. 승완이 야구를 하는 것에 흥미를 보인 슬기의 오빠가 슬기를 사이에 두고 알 수 없는 야구얘기를 했다. 슬기는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일부러 비아냥대는 것 같아서 화를 내자 오빠는 그럼 너도 야구 배우라면서 역으로 화냈다. 그렇게 투닥거리는 걸 승완은 뻘쭘하게 지켜봤다. 그러다가 오빠가 친구들이랑 놀러갔을 때 승완은 슬기에게 사과했다. 슬기는 이게 사과할 일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그날 이후로 승완은 슬기한테 야구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니 그냥 서로 얘기하고 놀 시간이 없었다. 학교에서라도 만나면 좋을 텐데 1,2학년이후론 반이 겹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젠 슬기도 방과 후에 미술부에 들어가서 그림을 배웠기에 둘은 친''던 사이가 되어 버렸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남자애들은 남자애들끼리 여자애들은 여자애들끼리 노는 경향이 강해졌다. 승완은 거의 남자애들 이랑만 놀았다. 슬기과 친한 여자애들이랑 놀았을 때 가끔씩 승완을 이상한 취급했지만 슬기는 '야구하느라 그래. 원래 아기자기한 거 좋아하고 착해'라고 말하면서 승완이 과거에 얼마나 섬세하고 다정한 아이였는지 설파했다. 하지만 슬기의 마음속에서도 승완에게 이상한 감정이 생겼다. 2학년 때 한 달가량 오른손을 안 쓰겠다면서 왼손으로만 글씨 쓰고 왼손으로 젓가락질하다가 선생님한테 혼이 난 게 생각났고 그 다음엔 같이 야구하는 오빠들한테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떠올랐다.

 

 

 

'남자가 되고 싶은 걸까.'

 

 

 

슬기는 방과 후 미술부에선 항상 창가자리에 앉았다. 가끔씩 운동장을 힐끔힐끔 딴청 피운다고 선생님에게 혼나기도 했다. 주황색인간들이 뙤약볕아래에서 열심히 뽈뽈대며 달리고 있었다. 저 멀리 주황색 하나가 동떨어져서 뒤쫓아 가고 있었다. 검정색으로 크게 77이라고 써져있었다. 슬기는 애써 못 본 채 그림을 그렸다. 선생님이 채색을 하라고 하자 가방을 뒤적거리던 슬기는 팔레트를 교실에 두고 온 걸 깨달았다. 이내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교실로 향했다. 팔레트를 가지고 미술실로 돌아가려는데 옆 반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창문을 빼곡 하고 보니 남자애들 무리였다. 그 중 한명은 반장선거 하듯이 칠판에 정자를 긋고 있었다. 슬기는 문을 열고 뭐 하는 거냐고 할 만한 깜냥이 되지 않았다. 혹시 자기를 눈치챌까봐 몸을 휙 숨긴 채 귀를 문 가까이에 조심히 갖다 댔다.

 

 

 

"현상아가 1위냐 정서영이 1위냐."

"야 유진이가 최고지 걔넨 화장 빨이야."

"걔 남친 있어."

"누구랑 사귀냐."

"재성이 형이랑."

"시발."

"5반애들 등수 다 매겼지. 다음 6반 매기자."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대화 속에 들어갔을 걸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선생님한테 가서 얘기하면 혼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지만 자기가 말했다는 게 들켜 고자질쟁이로 저기 무리사이에서 자기 이름이 계속 언급될까봐 두려웠다. 가슴을 한번 쓸어내리고 들키지 않게 실내화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히 디뎠다.

 

 

 

"5반에 한명 빼먹었다."

"누구."

"손승완."

 

 

 

승완의 이름이 들리자 슬기는 갑자기 멈췄다. 빨리 미술실로 뛰어 가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다리는 그러지 못했다. 심장 콩닥거리는 소리가 슬기의 귀에 크게 울렸다.

 

 

 

"야 걔가 여자애냐 완전 남자애지."

"맞아 걘 여자라고 느껴지지도 않아."

"이름도 존나 상남자잖아."

 

 

 

슬기는 승완이라는 이름이 딱히 남자애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봐와서 였을까. 흔하지 않은 그런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걔 남잔 줄 알고 야구부에서 데려갔잖아."

"우리학교 야구 개좆밥이니까 쓰는 거지 저번에도 본선에서 탈락했잖아."

"그래도 걔 구속 95 라서 대회에도 데려가잖아."

"야 나 아는 친구는 110이래."

"어차피 중학교 가면 남자애들한테 털리게 돼 있어. 우리가 해도 걔보다 잘 던질걸."

 

 

 

슬기는 정말 저새끼들을 죽이고 싶었다. 죽이진 못하더라도 한대 치고 싶었다. 하지만 슬기에겐 힘도 말빨도 없었다. 미술실에 허겁지겁 도착해서 선생님에게 갑자기 어지러워져서 집에 가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흔쾌히 허락해줬다. 그 새끼들과 마주칠까봐 슬기는 도저히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집에 갔다. 침대에 누우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누가 들어도 야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에 승완이도 있겠지. 슬기는 자기 집에서 학교가 가까운 게 원망스러웠다. 이불을 꽁꽁 싸매 꺽꺽거리며 소리를 묻혔다.

 

 

 

*

 

 

 

"우리 집 올래?"

"너 집에 지금 오빠 있지 않아?"

"지금 학원갔을 걸 괜찮아."

 

 

 

슬기는 평소처럼 방과 후가 끝나고 집에 가려했다. 그러다 출출해져 마트에 들렸다가 승완을 봤다. 그 때 이후로 학교에서 마주칠까봐 교실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방심한 사이에 슬기는 승완과 마주쳤다.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승완이 슬기에게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슬기는 몇 번 가본적도 없는 승완의 집 앞에 서있었다.

 

 

 

"뭐해? 빨리 들어와."

 

 

 

슬기는 조금 주춤하다가 이내 발걸음을 뗐다. 남의 집에 가면 어디든 긴장했지만 승완이네 집은 긴장을 넘어 위압감을 줬다. 그 집에 첫 발을 내디딘 순간이면 발라당 넘어질 것 같았다. 거긴 모든 것이 미끌거렸다. 책상도 의자도 먼지 한 톨 없는 엄청 큰 서재도. 승완의 방에 들어가서야 그 미끌거림에서 해방됐다. 미끌거리지 않는 손승완의 야구글러브. 끝이 헐거워져서 실밥이 다 터져버리고 찢겨진 야구글러브들이 벽 선반 한 칸을 가득 채웠다. 색깔도 가지각색에 지금은 맞지도 않을 사이즈부터 최근에 구멍이 난 글러브까지. 승완은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오늘 연습 안 해?"

"감독님 연수 가셔서 오늘은 전체휴식이래."

"내일도 휴식이야?"

"아니 내일은 돌아오시니까 연습해야지."

 

 

 

승완은 당연한 듯이 말했다. 창밖엔 아침부터 내린 비가 그칠 줄 몰랐다. 저 날씨에 야구하는 게 이상한 거라고 슬기는 생각했다.

 

 

 

"나 이제 투수 안 해."

 

 

 

승완이 새로 산 글러브에 바세린을 바르며 덤덤하게 말했다.

 

 

 

"쫓겨난 거야?"

"쫓겨난 건 아니고 우익수로 바뀐 거야."

"너 잘 던졌잖아. ?"

"지금 한명 비어가지고 뭐 어쩔 수 없지."

"그렇구나."

 

 

 

슬기는 우익수가 뭔지도 몰랐다. 승완의 경기는 한번밖에 본 적 없다. 그것도 학교에서 강제로 4학년을 다 끌고 가서 봤던 기억. 애들은 수업 안한다고 좋아했지만 차라리 수업을 받고 싶었다. 승완이 정말 탈탈 털렸기 때문이다.

 

 

 

"뭐하고 놀까."

"글쎄."

 

 

 

슬기는 승완과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놀았다. 매일매일 질리도록 봤는데도 항상 하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오랜만에 노는 건데도 어떻게 놀아야할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났다. 말이 끊기고 생긴 이 정적이 평소보다 더 길어서 슬기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날이 개면 시내로 나갈 수라도 있을 텐데 비는 그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영화 볼래?"

 

 

 

정적을 깨고 승완이 책장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꺼내며 말했다.

 

 

 

"그래."

 

 

 

디즈니 만화 같은 걸 봤다. 보는 중간에 승완이 스파게티를 해줬다. 둘이 먹기엔 엄청 적은 양이었는데 그마저도 승완은 먹는 둥 마는 둥해서 산더미처럼 남았다. 슬기는 억지로 꾸역꾸역 먹었다가 체해서 곧장 집에 갔다.

 

 

 

"."

 

 

 

종소리처럼 맑게 울리는 소리가 귀에 울리자 슬기는 잠에서 깼다. 깨어나자마자 온 삭신이 쑤셔왔다. 음식 먹고 체한적은 처음인 것 같다. 오랜만에 승완과 오래 놀 수 있었는데 그 시간을 날린 것 같아 아까웠다.

 

 

 

"."

 

 

 

또 다시 맑은 소리가 났다. 시끄럽게 외쳐대는 소리도 들렸다. . 바깥의 소리가 계속 나자 슬기는 오빠방에 있는 mp3랑 이어폰을 훔쳐 두 귀를 막았다.

 

슬기는 승완이 곧 야구를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기의 예상과 다르게 우익수로 잘 적응하고 있다고 승완은 간간히 문자를 보냈다. 슬기는 몇 번을 지웠다 고쳤다 하다가 중학교 때도 할 거야 라고 물었다. 승완은 아니라고 답했다. 슬기는 그 대답을 한참 바라보다 액정이 검게 변할 때쯤 승완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거잖아 중학교 가면 더 할 수 없도록.'

 

 

 

슬기는 핸드폰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그날은 지독한 악몽을 꿨는데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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