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린]봄의 너에게
봄의 너에게
Wendy X Irene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을 해보지는 않을까. 스쳐 간 사람이 문득 생각이 날 때, 바람이 부는 것만으로도, 비가 오는 것만으로도, 잊었다고 했던 사람의 얼굴이 문득 떠올라 기억에 사무칠 때가 있지 않을까. 같이 하던 게임, 같이 보던 드라마, 같이 했던 모든 것들을 혼자서 했을 때, 문득 느껴지는 빈자리의 공허함에 외로움을 탔던 적이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을 함께 할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영원’ 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을 때, 영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의 절망감을 느껴 본 적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손에 들린 코코아가 식은 것조차 모르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네가 그렇게 생각이 난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지금 이렇게 느끼고 있는 나뿐이 아니라 어떤 누구도 이런 사무친 기억이, 사무친 감정이 있지는 않을까. 언젠가는 잊을 기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영영 지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이 가슴에 묻어두고 싶은 기억이고, 추억이고 사람이었다.
잊어야지. 라는 말은 꽤 무책임한 말이 아닌가 싶다. 이미 저장된 기억 속에서 어떻게 쉽게 잊을 수가 있을지. 그게 나쁜 기억이라도, 나쁜 기억조차 기억 속에 저장되어 버린 것인데.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잊고 싶어도, 아무리 잊고 싶어도, 어떤 생각을 하고 안 한다고 하더라도, 기억은 계속되고, 영원히 머무는 것이라 생각을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더욱 그렇지는 않을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을 했다고 그 사람을 잊을 수는 없다. 사랑했으니까, 추억이 많으니까. 안 좋은 이별이라도, 그 사람과 나누었던 기억이 머리에, 마음에 저장되어 있으니까.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우연히 메일함을 열었다. 우연히 연 메일함에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꼭꼭 숨겼던 비밀 상자를 연 것처럼 우리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봄이 오려나 보다. 비가 많이 내려.’
사무친 기억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는 나긋했으며, 간드러졌다. 듣는 이의 귀가 미친 듯이 녹아내릴 것만 같던 그 목소리는 오로지 저만을 위한 것이라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봄이 오려나 보다. 말을 하는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절로 지어지는 제 얼굴은 어땠을까, 마냥 행복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날도 비가 잔뜩 오는 날이었다. 오늘처럼 구슬프다는 느낌이 아니라, 조금은 축 처지는 분위기 이긴 했지만, 곧 감성으로 가득 한 사랑이 담긴 분위기로 바뀌었던 비가 오는 날의 분위기였다.
‘너 그거 모르지. 봄은 항상 준비하고 있어. 겨울이 지나고, 자신이 피어날 준비 말이야.’
‘무슨 말이야?’
‘저 만의 계절. 저만을 위한 무대 같은 거 말이야. 봄은 그렇게 자신만의 계절을 준비하면서 겨울이 가고 자신이 필 거 같을 때, 비를 내려.’
감수성이 풍부했다. 그 감수성을 저는 따라가지 못할 정도여서, 이해하지 못했던 때도 많았는데, 유독 그때의 그 말은 여전히 기억에 간직하고 있었다. 봄이 핀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봄이 제가 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 기억에 담아두고 있었다.
‘나는 그런 봄을 기다려.’
‘왜?’
봄을 기다린다는 들뜬 얼굴을 기억한다. 기억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흐려진다고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선명하기만 한 것일까. 너에 대한 기억이어서일까. 아니면 우리의 추억이 소중해서일까. 둘 다 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선명한 기억이 씁쓸하기는커녕, 웃음이 난다는 것은 우리의 추억은 모두 소중하다는 것은 아니었을까.
‘너와 그 봄을 맞이하고 싶어서. 뭔가 봄이라는 계절은 말이야. 다른 계절과는 다르게 찬란한 거 같아. 더웠던 여름이 가고, 쌀쌀한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을 맞이한 우리에게 따듯함을 주는 계절 말이야. 아름다운 꽃들이 피고, 아름다운 향이 나는 그런 찬란한 계절.’
봄은 그런 거 같아서. 따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던 얼굴이 자꾸만 선명해진다. 가만 보면 너는 봄과 닮아있었다. 네가 말하는 봄과 닮아있었다. 찬란하다는 말이 너에게 그토록 이나 잘 어울렸는데. 창가에 기대어 비가 내리는 것을 보던 의자에 깊이 기대며 두 눈을 감았다.
너에게 봄은 얼마나 아름다운 계절이었던 것일까.
‘찬란한 그 계절에 너와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지금 우리는 왜 그 찬란한 계절 속에 없는 것일까. 네가 그랬다.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너의 말대로 봄이 오려나 보다. 이렇게 비를 내리는 것을 보니, 봄이 코앞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이미 식어 버린 코코아가 들린 잔을 내려놓았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창밖을 내다보며 사색에 잠겨 있던 것을 멈추어 보았다. 다른 것에 시선을 두고, 다른 것을 신경 쓰고, 일을 붙잡아 보려 해도 이미 시작된 생각의 꼬리는 자꾸만 길어졌고, 자꾸만 선명해져 갔다.
‘우리는, 정말 같은 계절 안에 사는 것이 맞을까?’
봄 안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던 우리는, 계절이 바뀌면서 서로의 시간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는 천천히 가고, 누구는 빠르게 가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너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나의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흘렀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계절을 맞이했다. 점점 따듯해지는 너와 점점 차가워지는 나의 계절의 온도는 너무도 달랐다. 그런 네가 나에게 물었지. 같은 계절 안에 사는 것이 맞냐고.
나는 그런 너에게 어떤 답도 할 수 없이 입을 꾹 물어야만 했다. 나로 인해 하루, 하루 지쳐가고 있는 너를 알면서도 나는 나의 마음이 중요해서 그런 너를 무시했고, 그런 너는 점점 나에게서 멀어져만 가려 했다.
‘너는, …겨울에 머물러 버린 것 같아. 주현아.’
봄에 머물러 있는 너와는 다르게, 나는 시간을 타고 흘러 겨울에 멈춰버렸다. 나의 계절은 추웠다. 나의 그 차가움이 너를 얼마나 상처 줬던 것일까. 누가 봐도 상처받은 얼굴에 나는 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쏟아내야만 했지. 너에게 내 모든 감정을 쏟아내는 것에 넌 여름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여름처럼 너무 뜨겁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서늘해져 볼까 싶어서. 선선한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다시 봄이 되고 싶었던 나는, 봄이 되지 못하고 겨울에 머무르게 되었다.
겨울에 머물렀던 나를 나는 지금 후회해. 왜 너에게 봄이 되어주지 못했을까 싶어서, 그것이 후회된다.
‘툭 하면 짜증내고, 툭 하면 화내는 네가, 나는 …너무 지쳐 버렸어.’
너의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면서도 나는 알려 하지 않았다. 그때에도 나는 내가 중요했다. 내 마음이 중요했다.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왜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지에 대한 원망이 먼저 들었다. 그때의 우리는 어렸으니까. 라는 변명이 과연 변명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변명하고 싶다.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그때의 나는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것을, 너를 만나게 된다면 말하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도 너를 좋아해.’
‘손승완.’
‘그런데도 네가 좋아.’
이기적인 내가 그런데도 좋다는 너에게 나는 안심했다. 정말 이기적이지. 나는 왜 그렇게 이기적이었을까. 너에게 온갖 성격을 부릴 대로 부렸으면서, 미안하다는 말 하나 건네지 못할망정, 더 아껴주지 못할망정, 더 배려해주지 못할망정 안심하기나 했던 그때의 내가 너무도 후회스럽다.
‘그러니까, …네가 조금만 고쳐주면 안 될까?’
너는 항상 그랬다. 항상 내가 우선이었다. 그런 나에게 너는 네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배려를 보였다. 그런 배려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눈물을 글썽이며, 네가 안아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나에게 지쳐 버렸다는 네가 혹시라도 이별을 말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나를 떠나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마음에 안도가 찾아와 나는 너의 품을 찾기 급급했다.
‘좋아해, 주현아.’
그런 나를 알아챈 너는 그렇게 말해 주었지. 달콤한 말로 나를 안심시켜 주었지.
‘주현아.’
그랬던 우리가 싸움할 때면, 세상 모든 미움이 이 작은 마음에 다 담겨 버리곤 했다. 인상을 찌푸리는 너와 난 서로에게 혹시나 더 나쁜 소리를 할까 입을 다물어야 했고, 결국에는 침묵이 이어지곤 했다. 좋아한다는 너의 말을, 조금은 고쳐달라는 너의 말을 들은 나는 또 눈물을 터트려야 했다. 이상하게도 너에게만큼은 눈물이 많아졌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이 왜 네 앞에서만 나는 것인지, 우는 나를 보는 너의 눈썹은 축 처졌고, 너의 눈가에도 금세 물기가 가득했는데.
‘좋아해.’
너의 진심을 내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너의 그 진심을 나는 외면하지 않았다. 너의 품에 안겼고, 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때, 내 등을 쓰다듬는 너의 손길을 아직도 기억한다. 너무도 따듯한 손길이었으며, 너무도 아릿한 손길이었다.
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항상 그런 식으로 나왔던 나를 너는 어떻게 다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좋아해, 사랑해. 고백하면서 우리는 항상 화해했다.
고칠게.
라는 말은 무색한 고백이었다.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진학하는 과정에서 나는 낙오자가 되었다. 낙오라는 말이 조금은 잔인하기는 하지만, 내가 느끼는 바로는 그랬다. 모두가 가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 혼자 가지 못했다는 것이 좌절되어서, 나는 재수를 택해야 했다. 재수를 택하는 것은 나에게 당연했다. 항상 정해둔 목표치로 공부했다. 집이 그렇게 잘 살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 안 모두가 기대하는 유일한 희망인 나라도 대학을 잘 가서, 보란 듯이 성공을 하는 것이 내 목표였다. 그것을 너에게 항상 말했고, 너는 나를 응원해 주었다.
그런데 나는 사랑에 더 미쳐있었다. 너에게 미쳐있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만난 우리는 공부보다는 서로에게 미쳐, 서로를 보는 데 급급했다. 사실 나는 그랬는데, 너는 그래도 네 할 일을 했던 모양인지, 네가 원했던 대학을 갔고, 네가 가야 했던 과를 갔다. 너희 집은 부유하고, 또 부유해서, 남부러울 것 하나 없이 자라,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고,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것에서부터 남모를 회의감을 느껴야 했고, 남모를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사랑하는 너임에도 나는 그랬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성공을 항상 바랐으니까.
나한테 고등학교 3학년의 시간은 너무도 지옥 같았다. 집안에 일이 터졌고, 나는 그것에 극심한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으며, 유일한 버팀목인 너에게 한없이 기대었고, 그런 나를 네가 이해해줬으면 했다. 너에게 미쳐서, 사랑에 미쳐서, 그 시간에 지쳐서 공부보다는 끝없는 방황을 해야 했던 나의 재수는 어쩌면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재수에 꼭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기숙학원을 들어가게 되었고, 너는 또 응원해 주었다. 너의 응원은 항상 힘이 되었다. 그래도 나 하나 응원해 주고, 나만 바라보는 이가 있다는 것이 나는 정말 힘이 되었다. 그랬기에 나는 너에게 더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기숙학원에서 받는 휴일에 나는 가족보다 너를 만나야 했다. 너 또한 너의 그 시간을 나에게 다 투자해줬으면 했다.
‘오늘은, 못 만난다고 했잖아.’
‘네가, …나보다 시간이 없어?’
그때, 너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나는 그 이유를 다 헤아릴 수가 없는 상태였다. 잔뜩 예민해져 있던 나는 너를 의심했다. 의심하고, 의심했다. 혹시나 네가 나에게 마음이 식은 것은 아닌지, 혹시나 네가 다른 사람이 생긴 것은 아닌지, 불안하고, 또 불안해서 너를 끝도 없이 의심해야 했다. 난감해하던 너의 얼굴과 너의 깊은 한숨을 보고 나는 또 화를 내야 했고, 너는 그것에 질려 했다. 우리는 항상 같았다. 항상 싸움이 터질 때면 같은 반응을 보였다. 너는 한숨을 내쉬고,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휴대폰 줘 봐.’
‘배주현.’
‘시끄러우니까, 내놔.’
나는 너에게 집착했다. 너의 휴대폰 목록을 확인하고, 너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런 내가 너는 얼마나 질렸을까. 얼마나 싫었을까. 그런데도 너는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너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지. 너의 사소한 프라이버시까지도 나에게 보여주었지. 그러다가 발견하게 된 것은 어떤 남자와의 연락이었다. 누가 봐도 너에게 사심이 있는 연락들에 나는 또 화를 내야 했다. 너의 잘못이 아님에도 나는 그랬다. 너에게 화를 냈고, 너의 탓으로 돌렸다. 도대체 그때의 나는 왜 그랬을까. 지금에서야 어렸다는 핑계를 대면, 너는 이해해줄까. 너무도 생각이 짧았고, 너무도 예민했던 시기라면 넌, 이해해줄 수 있을까.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뭐?’
‘내 말은, 내 선에서 끝낼 수 있다고.’
‘상관이 없어?’
우리는 그때 잠시 이별했다. 서로에게 지쳐서, 서로에게 예민해져서. 아니 나에게 지쳐서, 너에게 예민해져서. 그래서 이별했다. 이별하는 시간까지도 나는 기숙사에서 너를 생각해야 했다. 너에 대한 생각에 눈물지어야 했다. 혹시라도 네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아닌지, 네가 정말 나에게 멀어진 것은 아닌지. 그것이 불안해서 울어야 했고, 그런 네가 보고 싶어 울어야 했다.
재수가 끝나고, 수능을 마쳤을 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네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찾아가야지 싶었을 때, 너는 나를 찾아와 다시 만나자는 말을 했다. 나는 기뻤다. 그러면서도 당연했다. 나는 네가 찾아올 줄 알았으며,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때부터 뒤틀리지 않았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나 지방에 있는 대학 가는데.’
‘응?’
‘나 서울에 없다고 한눈팔면 안 된다?’
‘내가? …걱정하지 마.’
‘너, 그래 놓고,’
‘주현아. 그 사람은, 말했잖아. 일방적으로,’
‘응, 일방적으로 널 좋아했지. 짜증 나.’
나는 결국 지방에 있는 대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래도 나름 좋은 과였기에 그것에 만족하고 가게 되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너와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나. 나는 또, 당연히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고, 너는 서울에서 나를 보기 위해 몇 번이고 내려오는 수고를 보여야 했다.
너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던 나와, 나를 보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왔던 너. 우리는 또 그것을 지쳐 했으며, 힘들어했지. 그때의 우리는 둘 다 어렸으니까.
‘승완아.’
‘응.’
‘넌 나를 좋아해?’
장거리 연애로 전향하기를 2년이 되었을 때, 나는 너에게 그렇게 물었다. 나를 좋아하는 것이냐 물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우리는 싸움 또한 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그저 그런 반응을 보였고, 서로에게 꽤 차가운 시선을 보일 때도 있었다. 우리는 점점 지쳐갔다. 서로의 사랑에, 서로의 집착에 지쳐갔다. 대학에서 지방을 다니던 나를 너는 내가 기숙사에 있었던 때처럼 집착했다. 거기서 뭐 하는지, 기숙사에 있는지, 모임에서 언제 기숙사로 돌아갈 것인지. 너는 꽤 불안해했다. 아마도 그 불안함은 내가 가졌던 불안함과 같을 것이다. 너는 똑같은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그것이 이해돼서 나는 너를 안심시켜 주려 했던 것 같다. 너를 더 자주 보기 위해 노력했고,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대학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나도 그것이 지쳐서, 그것이 힘들어서, 너 몰래 놀기도 했고, 너 몰래 외박을 하기도 했으며, 너의 연락을 받지 않을 때도 있었다.
만나면 밥을 먹었고, 흔한 거리를 돌아다니며, 흔한 영화를 보았다. 그것이 다였다. 오히려 고등학교 시절이 더 우리에게 추억이 많았던 것 같다. 너는 기억하는지, 네가 나에게 해주었던 기념일 이벤트들을 기억하는지.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너의 그 풋풋한 사랑을 기억한다. 작은 동네의 공원에 입구부터 뿌려져 있던 꽃길과 그 사이사이 놓여 있던 촛불 들. 그리고 그 끝에서 꽃다발을 들고 서 있던 너. 나는 그때의 기억이 가장 큰 행복으로 남아 있다.
그랬던 우리가, 또, 다시 찾아온 서로의 겨울을 버티지 못했다. 우리는 버티지 못했다. 항상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를 반복했던 우리지만, 싸우는 것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결국에 서로를 찾고, 사랑한다는 말을 했던 우리지만, 그때의 우리는 정말 이별을 한 것만 같았다.
‘…그냥, 이제는 지쳤어.’
‘아니야?’
‘…우리가, 힘들어, 나는.’
‘이제, 우린 아닌가 봐.’
담담한 이별이기도 했지만, 예고 없던 이별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이별했다. 그렇게, 멀어졌다. 그것이 너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담담하게 이별을 고하던 너를,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며, 또 너에게 고하던 나는 너에게 먼저 등을 보였다. 담담한 이별이었고, 끝끝내 맺게 된 결말이었지만, 우리는 많은 사랑을 나눴다. 우리는, 많은 추억을 나눴다.
이 모든 것을 다 담기에는 우리의 추억이 너무 많아.
이별하면서 나는 너와 걷던 거리를 지났다. 그 거리에는 우리의 추억이 많았다. 너와 자주 갔었던 노래방, 너와 자주 갔었던 밥집, 너와 자주 갔었던 카페. 모든 것이 우리의 추억이었다. 노래방을 지났을 때는 네가 나에게 불러주었던 노래들이 생각났다. 너는 미소를 지을 때 가장 따듯한 느낌이 들어서, 네가 미소 지으며 나에게 노래를 불러주면, 나는 마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만 같은 나긋함을 느껴야 했다. 나는 너와 노래방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너의 노래가 좋아서, 네가 나에게 불러주던, 노래가 좋아서, 네가 나만을 위해 불러주던, 노래가 좋아서, 노래방을 자주 찾았다. 네가 나만을 보고, 나만을 위한 노래를 하는 것을 볼 때면 나는 가슴이 벅차기도 했다. 노래방은 너와 나, 단둘만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고, 너와 내가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 안에서 너와 노래를 부르며, 너와 입을 맞췄던 풋풋했던 기억이 자꾸만 생각이 나서, 시선을 돌려 다른 건물을 보았을 때는, 너와 자주 갔었던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상황을 겪어야 했는데. 그 안에서, 나는 너에게 고백했고, 너는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다. 네가 나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었고, 나 또한 너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너와 처음 싸우던 장소 또한 그 안이었으며, 너와 화해를 했던 곳 또한 그 안이었다. 테이블을 하나 두고 마주 보면서 우리는 다양한 표정을 지었었는데.
‘헤어지자, 승완아.’
그랬던 우리가 다른 곳에서 이별한 것을 보면 정말 우리는 이별을 한 것이 맞나 보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났을까. 너에게서 연락이 왔다. 사실, 연락한 것은 내가 먼저였는데. 그냥 아프다는 말을 했었다. 너 때문에 내가 아프다고. 술을 마시고 한 연락은 아니었다. 그냥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너를 다 잊지 못해서, 독감에 취해 나는 그렇게 너에게 아프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보냈던 것 같다. ‘승완아, 나 너무 아파.’라는 나의 연락에 너는 얼마나 놀랐을까. 나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보냈으리라고 나 스스로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보냈다고? 하기에는 모든 기록이 남아 있는 휴대폰이었다.
[역 앞에서 기다릴게, 나와.]
나를 찾아온 너의 연락을 나는 어리석게도 무시했다. 역 앞이라는 너의 연락을 나는 잔인하게도 무시했다. 정말 너를 다시 보게 된다면, 나는 또 그 끈질기고도, 힘든 사랑을 다시 시작해야만 할 것 같았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우리의 잘못된 뒤틀린 사랑을 나는 힘겨워했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나는 너의 연락을 모두 거절했다.
모두, 받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너는 쉽게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너는 얼마나 나를 기다렸던 거니. 나는 아직도 궁금해. 다음 날, 택배를 받기 위해 기숙사 경비 아저씨에게 찾아갔을 때 아저씨가 그러더라.
‘아, 배주현? 어떤 여학생이 어젯밤에 이거 전해주라고 하던데. 배주현 학생 맞죠?’
어젯밤이라는 말에 나는 경악해야 했다. 어젯밤? 너에게서 연락 온 것은 분명 낮이었는데. 나는 탄식하고, 또 탄식해야 했다. 나의 잔인함에 넌 얼마나 상처받았을까. 나의 이기적임에 너는 얼마나 아파했을까. 나는 마지막까지 너에게 상처를 주었고, 너를 아프게 만들었다.
연락해볼까 했지만, 나는 연락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죄책감이라는 것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고, 이기적임이라는 것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너와 정말 끝내야겠다는 마음으로 너와의 모든 연락망을 끊었던 것 같다. 자꾸 이런 식으로 있다가는 너도, 나도 이보다 더한 최악의 상황만을 볼 것 같아서, 나는 그렇게 했다. 너의 연락처를 삭제하고, 너와 이어져 있던 모든 sns와 메일을 지웠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멀어져갔고, 시간은 점점 지나기만 했다.
[혹시, 네가 볼지 몰라서, 이렇게 메일을 보내.]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3년 전 너에게 왔던 연락을 이제야 받게 되었다.
[주현아, 너랑 연락이 닿지 않아서, 혹시라도 볼까, 봤으면 좋겠다. 음, 무슨 말을 써야 할까. 자꾸만 글자를 썼다, 지웠다 반복해. 수많은 생각을 하며, 수많은 글을 썼어. 어떻게 하면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너의 SNS에도 들어가 메시지도 남겨보고, 너의 미니홈피에 들어가 방명록도 남겨 봤는데, 너는 정말 삭제를 한 모양인지 읽지를 않더라고.
다 삭제했는지, 아니면 네가 보고 만 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내 생각을 정리해서 너에게 메일을 보낼게.
주현아. 우리가 이별 한지, 벌써 반년이 지났어. 우리가 만났던 지난 5년간의 추억은 정말 추억으로 남겨진 것만 같이 벌써 까마득하기만 해.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너를 잊을 수가 없어서, 추억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아서, 나, 네가 그렇게 외치고, 외치던 영화를 찾아봤어. 노트북 말이야. 네가 나한테 보라고, 보라고 했던 영화잖아. 우리가 그렇게 생각나니까 보라 했던 영화를 결국 봤는데, 네 말대로 우리가 생각나더라. 나는 있지, 우리가 결국 그 영화의 결말처럼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그 영화 속 주인공들은 결국 첫사랑의 추억을 계속 쥐고 있는 거잖아. 너는 그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에 와서야 너의 생각이 궁금하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나에게 영화를 추천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생각을 하면 왜 이렇게 후회가 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봄이라는 찬란한 계절에, 너와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 말이야. 벌써 봄이 찾아오고 있어. 벌써, 겨울이 지나고 있어. 지금, 나는 네가 너무 생각이 나. 이 겨울이 지나고, 찾아온 봄에는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있지, 모든 게 후회된다. 네가 이 메일을 열어 보게 될 날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네 마음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냥, 내 모든 감정을 다 쓰는 거니까. 네가 이해해줘. 우리가 헤어졌던 그 날, 나는 네가 나가자마자 멍하니 있어야만 했어. 모든 것이 현실 같지가 않았어. 우리는 다음날 다시 만날 것 같았고, 다음날 다시 화해할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어. 그런데, 먼저 일어난 너를, 먼저 내게 등을 돌린 너를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자꾸만 현실이 나를 뒤덮는 거야. 그래서 너를 잡으러 나갔거든? 그런데 이미 늦었더라. 이미, 늦은 후더라. 그래서 너에게 다시 연락해볼까. 했는데, 쉽게 할 수가 없더라고. 다시 연락하게 되면, 우리의 똑같은 사랑이 또다시 시작될까 봐. 또,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받고, 아파할까 봐. 엄두가 나지 않더라.
그런데 그때 나는 왜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했을까. 너에게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너를 찾아가 기다리면서 나는 또 많은 생각을 해야 했어.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우리가 고치면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고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어. 그리고 혹시 네가 나온다면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 다시 한 번 헤쳐 나가 보자고, 다시 이겨 보자고, 우리 함께, 그렇게 해보자고. 말하려 했는데. 아쉽게도 그렇게 하지 못했네.]
다 읽지도 못한 채 울컥 눈물이 터졌다. 참고, 참으며 읽어 내리던 너의 메일에서 너의 모든 감정을 느껴 버린 나는 울지 않을 수가 없다. 너는 이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나에게 이 메일을 보냈던 것일까. 나는 상상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있지, 주현아. 사람은 참 이상해. 있을 때는 힘들었던 것들이, 없으니까 다 이겨 낼 수 있을 것만 같아. 그리고 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겠지? 그래서 나는 너를 잡지 못했어. 그래서 너를 다시 찾지 못하고 있나 봐. 너에게 무작정 찾아갔을 땐, 우리가 다시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하고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여기서 멈춘 것은 어쩌면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였던 것은 아닐까 싶어.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 있잖아. 헤어졌던 연인들이 다시 만난다고 다시 헤어질 일은 없을까? 말이야. 그때, 나는 너에게 미쳐있었기 때문에, 우리 또한 이별과 만남을 얕았지만 자주 했기 때문에, 그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어. 사랑하면, 서로가 사랑하면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나. 싶었는데,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아. 이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우리는 이미 진지한 이별을 한 번 했잖아. 그렇지만 우리는 다시 만났고, 우리는 또 결국 서로에게 지쳐서 헤어졌어. 이게 나는 참 이상해. 만나면 서로에게 지치고, 힘들어하는데, 왜 자꾸 다시 만나나 싶은데 우리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아닐까? 우리에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나쁜 점도 알지만, 좋은 점들을 많이 알고 있기에, 우리의 추억이 이렇게 끝내기에는 너무도 넘쳐서 아닐까?]
나는 생각보다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생각보다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라서, 네가 없는 자리를 채우기 위해 애썼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연애를 했다.
그런데 있지, 이상하게도 너의 자리를 채울 수 있는 이는 단 하나도 없더라. 너의 빈자리만 자꾸 느껴지고, 너에 대한 내 그리움만 자꾸 커지더라. 그들에게서 너를 찾으려 하더라. 여전히 나는 그러고 있다. 너와 조금이라도 닮은 사람을 찾아보려 하고 있다. 이럴 거면 너를 찾지. 너에게 다시 돌아가지. 하는 이들도 있지만, 너도 알고 있다시피 우리가 다시 만날 확률은 희박하다. 그냥 손승완 다시 만나. 라는 말은 말이야 쉽다. 승완이 다시 잡아. 라는 말 또한 말이야 쉽다.
말은 쉽다. 말은 항상 쉽고, 어떻게든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은 쉽지 않기 때문에, 이미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기 때문에, 나와 같이 너 또한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너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상처받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만나도 그것이 겁나서 금방 헤어지고 말 것이라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나는, 그렇게 너를 잊어 보려고. 이 메일을 읽었을 때의 너는 나를 잊었을까? 아니면 나처럼 잊는 중일까. 나는 여전히 너를 잊지 못하고, 노력만 하고 있어. 너의 모든 것들이, 너와 닿을 수 있는 것들이 사라지고, 멀어질수록 나는 현실에 직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어. 그런데 사실 잊는다는 것에 대한 것도 나는 모르겠어. 잊는다고 해봤자, 잊었다고 해봤자. 너, 그리고 너와 나눴던 모든 것들을 잊지 못할 거야. 나는 그럴 수 없을 거야. 몇 년이 지나도, 우리가 나눴던 추억을 돌이켜 보면, 나는 또 너를 그리워할 거고, 너를 그리겠지.
아,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내 이야기를 끝낼게.
주현아. 나는 우리가 같은 계절에 살았으면 싶었고, 같은 계절을 함께 나누고 싶었어. 같은 계절에서, 같은 날씨를 맞으며, 너와 나. 단둘이 그 계절의 온전함을 느끼고 싶었어. 그랬던 내가 너한테 너 혼자서 겨울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했지. 사실 나, 그 말을 하고 많이 후회해. 나의 말을 듣고서, 잔뜩 상처받은 너의 얼굴이 자꾸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는 그저 너의 시간을 걸었을 뿐인데, 나 혼자 머물러 있으려 했던 것은 아닌가 싶어. 그 계절이 좋아서, 그 계절에 있는 우리가 좋아서, 그래서 욕심을 잔뜩 냈던 건 아닌가 싶어. 너를 생각했던 것보다는 나를 생각했던 것 같아. 사실 계절은 중요하지 않잖아. 온도도, 색도, 어떤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중요했던 건데.
그냥, 모든 게 아쉬워. 그때 더 생각하고, 더 너를 위할걸. 조금만 덜 이기적일걸. 나는 왜 그렇게 이기적이었을까. 주현아. 나는 사실 너를 보면 봄이 자꾸 생각났어. 너에게 계절이 있다면 봄이지 않을까 싶었어. 그런 너를 나는 사랑했고, 그런 계절을 나는 사랑했어. 나를 보며 짓는 너의 미소가 봄에 부는 산뜻한 바람 같았고, 나를 보며 말하는 너의 목소리가 봄과 같은 따스함 같았어. 너는 그랬어. 그래서 내가 더 욕심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너를 겨울로 가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참 이상하지? 사실 계절은 중요하지 않는데. 자꾸만 계절에 우리를 대입하는 것이. 나도 내가 웃기고 그래.
정말 마지막으로, 주현아. 5년 동안 우리가 나누었던 추억은 빼놓을 것이 단 하나도 없었던 추억이야. 정말, 우리는 고등학생 때 만나서 사랑했고, 그 사랑에 대한 의심에 대한 망설임은 없어. 우리는 정말 사랑을 했으니까. 성인이 되고서, 각자의 생활을 지켜야 했을 때, 우린 서로에게 많이 방황하고 아파했잖아. 이제는 네가 안 아팠으면 좋겠다. 네가, 안 힘들었으면 좋겠어. 앞으로 네가 만나게 될 사람들도, 너를 힘들지 않게 했으면 좋겠고, 너를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때문에 힘들었던 네가, 아팠던 네가,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또 아프고 힘들게 된다면, 우리의 이별이 조금은 많이 슬퍼질 것 같아.
아, 정말 말이 많았지? 미안해. 사실 네가 이걸 다 읽을지도 모르겠어. 그냥, 정말 마지막일 것 같아서, 하고 싶은 말을 보낸다는 것이 이렇게 길어졌네.
사랑했어, 주현아.]
메일이 끝났다. 한참 쏟아졌던 눈물은 메일이 끝나서야 멈췄다. 혹시 다른 메일이 있지는 않을까, 다른 너의 흔적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나는 메일함을 뒤지고 뒤진다. 하지만, 너에게서 온 연락은 단 한 통뿐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 또 내 가슴을 죄어오는지 모르겠어.
너는 지금쯤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을까? 너에 대한 구구절절한 생각을 종종 하고는 했지만, 오늘같이 네가 생각나는 날은 또 처음이라서, 이 감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것이 처음이라서 나는 조금 당황스럽다. 이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왜 이렇게 쓰라리고, 아프지? 왜 이렇게 숨이 조여 오는 것만 같을까.
사실은 주변에서 종종 너의 이야기를 듣고는 했다. 너의 이름이 조금이라도 들려오면 나는 급급히 피하기 바빴는데, 오늘은 그것이 또 후회돼. 너의 근황을 조금이라도 들으며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너는 지금쯤 무엇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구차하지만 궁금하다. 조금은 초라하지만 궁금해. 나는 왜 그렇게 너를 피해야만 했을까. 너의 친구들을 보는 것조차 두려워서, 네가 자주 갔던 곳을 나는 여전히 가는 것이 망설여지곤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서울에 올라와 일을 다니면서, 버스 안에서 너와 제일 친했던 슬기를 만난 적이 있다. 나를 보면서 당황하던 그 아이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유일하게 너와 나 사이를 알고 있던 아이여서 그럴까. 나를 보며 당황하던 얼굴을 보고 나는 인사하지도 못한 채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는데. 그래도 우리가 사귀었을 때, 같이 자주 놀곤 했던 아이의 시선을 피하면서 나는 또 손승완, 네가 생각이 났고, 우리의 추억이 생각이 났고, 그 당시가 생각이 났다.
‘사랑했어, 주현아.’
왜 이 말이 음성으로 들리는 것 같지. 왜 너의 따듯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을까. 답답한 마음에 태블릿을 껐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오는 비가 마치 이 메일을 읽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는 아이러니한 생각이 든다. 비를 보니 눈물이 다시 났다. 그냥, 하염없이 났다. 자꾸만 네가 생각이 나고, 너에게 못 해 주었던 모든 시간이 생각이 나고, 나가지 않았던 그 날이 생각이 난다.
그런데 있지, 너는 모르는 것이 있다. 나는 너와 헤어진 3년간 많은 연애를 했고,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단 한 번도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 없었다.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 없었다. 그 사람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고, 그 사람 때문에 아프고, 힘들었던 것은 오로지 손승완, 너밖에 없었다. 너뿐이었다. 그런데 또 웃긴 것은, 뭐냐면 승완아. 그 많은 연애 속에서 행복한 추억으로 남은 것이 너뿐이라는 거야. 연애 속에서 그 사람 때문에, 행복하고, 그 사람 때문에 진심으로 웃고, 그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너뿐이라는 거야. 너밖에 없다는 거야. 나는 과연, 너와 나누었던 사랑을 다른 이와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씁쓸한 마음에 태블릿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네가 보내온 메일을 다시 보았다. 너는 어쩜 메일의 제목까지 너와 같은지.
[봄의 너에게.]
참으로 웃기지. 나에게 봄은 너였는데. 봄의 너에게 말해 주고 싶은 것은, 우리가 사랑했던 순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찬란했던 봄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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