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옐]얼음꽃

2018. 2. 24. 15:04









얼음꽃


Wendy X Yeri


콜라








 비가 내린다. 성큼 내려앉은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가득하다. 꼭 닫은 창에 빗방울이 매달렸다 미끄러진다. 무채색 건물들에, 텅 빈 길가에 빗물이 고여 어느새 웅덩이가 된다.

 

 승완은 퍼뜩 잠에서 깼다. 맞춰놓은 알람 시간보다 한참 전이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승완은 제 옆에 있는 창문의 이중창을 닫았다. 휴대폰의 알람 설정을 끄고 게슴츠레 뜬 눈을 쓱쓱 만졌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은 승완은 창밖을 바라봤다. 작은 물방울들이 부옇게 떠다녔다. 거리에 움직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드물게 지나가는 행인들의 가라앉은 표정이 비 오는 날의 분위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중창을 닫았는데도 공기가 꽤 서늘했다. 겨울의 초입이었다. 구름이 가득한 하늘에서 떨어져 창에 흩어지는 빗방울들을 지켜봤다. 찬 비. 언젠가 배웠던 것 같다. 구름 안의 얼음이 녹아서 내리는 비라고 했다. 단단히 얼어있다 겨우 녹아내린 초겨울의 비는 얼마나 차가울지, 문득 궁금해졌다.

 

 문을 열자 비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승완은 눈썹을 얕게 찡그렸다. 붉고 진득한 냄새. 어느 순간부터 승완은 비 냄새를 그렇게 정의했다. 비가 오는 날엔 을 미루고, 외출도 자제했다. 옛날에 맡았던 비 냄새를 떠올리려 했다. 승완은 무심코 우산 밖으로 손을 뻗었다. 싸늘한 빗방울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금세 고인 빗물이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승완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적한 오후였다. 손님들이 서서히 자리를 비우고, 문 위의 딸랑거리는 종소리도 뜸해지는 시간이었다. 잔잔히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와 테이블을 닦고 있는 동료 아르바이트생만이 그들의 사명을 다하고 있었다. 예림은 카운터 앞에 앉아 재생 목록을 뒤적였다. 카페에 음과 리듬이 떠다니는 동안, 예림은 줄곧 노래를 휙휙 넘겼다. 예림의 손을 붙잡은 건 동료의 들뜬 목소리였다.

 

 

 

, 눈 온다. 예림씨, 한 번 봐요.”

 

 

 

 이 지역엔 눈이 매년 온다. 눈을 밟으며 거리를 돌아다닌 사람들이 카페에 들어오면 바닥이 지저분해질 것이다. 예림은 아무 말 없이 미적미적 일어섰다. 건너편 어두운 건물 벽이 하얗게 가려질 정도로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꽤 오래도록 눈 오는 장면을 감상했다. 거리가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 예림이 눈 쌓인 거리를 보며 할 일과 교대 시간, 바닥 청소의 상관관계를 계산하고 있을 때, 도어벨이 울렸다. 어느새 비어버린 카페의 유일한 손님이었다. 푹 눌러쓴 모자에 아직 녹지 않은 눈송이가 내려앉아 있었다. 동료를 제가 있는 카운터 쪽으로 부른 예림은 새 손님이 주문을 하고 카페 안쪽에 자리 잡는 걸 지켜봤다.

 

 어느덧 교대 시간이 되어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선 예림의 앞을 막는 사람이 있었다. 남자는 예림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목에 익숙한 문신이 있었다. 카페 사람들은 이제 이골이 난 이 근방의 불량배들 중 하나였다. 예림은 표정 없이 그를 노려봤다. 남자는 비킬 생각이 없어보였다.

 

 

 

죄송하지만 조금 비켜주실래요.”

싫다면?”

 

 

 

 동료가 휴대폰을 들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예림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댓바람부터 시비 걸지 말고 좀 나와요. 유치장에 또 처박히기 싫으면.”

경찰? 어디 불러봐. 죽여 버린다.”

 

 

 

 예림은 눈을 감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목부터 열이 올라오고 있었다. 낮지만 들리도록 욕을 뱉었다. 이 새끼들은 진짜 할 일도 없나. 남자의 눈이 번뜩였다.

 

 

 

너 뭐라고 했냐? 새끼? 이걸 그냥…….”

그만하시죠.”

 

 

 

 짙은 색 모자에 밝은 갈색 포니테일. 아까 그 손님이었다.

 

 

 

넌 뭐야?”

구제불능이네. 한심한 새끼.”

 

 

 

 모자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굉장히 차분했다. 남자의 손이 올라갔다. 예림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들린 건 남자의 작은 비명이었다. 그는 다리 사이를 움켜잡고 소리도 못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이변의 주인공은 흔들림 없이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얼굴을 몇 번 차이더니 의미 불명의 말들을 지껄이며 기어가듯이 나갔다. 모자 손님도 짐을 챙겨 자리를 떴다. 예림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방금 전의 일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동료가 다가올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던 예림은 그 모자가 앉아 있던 자리에 무언가 있는 걸 보았다. 포장된 것을 가까이서 보니 꽃 한 송이였다. 동료의 말들에 대충 대답해준 후 예림은 꽃을 집어 들고 카페를 나왔다.

 

 

 

 길이 미끄러웠다. 그제 내린 눈이 채 녹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승완은 땅만 보며 살금살금 걸었다. 얼음을 꾹꾹 밟으며 걷고 있는데, 저 멀리 오고 있는 다리와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든 승완의 눈과 마주친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기억력이 좋은 탓에 한번 본 얼굴은 잘 안 잊어버렸다. 승완은 빠르게 과거를 더듬었다.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위험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인물이라는 말이다. 승완이 생각하는 동안, 둘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상대는 별 다른 반응 없이 승완을 빤히 보고 있었다. 승완이 그냥 지나치려 하자 상대가 입을 열었다.

 

 

 

저기, 저 알죠? 그때 이거 두고 가셨어요.”

 

 

 

 포장된 모양이 익숙했다. 한 장면이 승완의 뇌리를 스쳤다. 그에게 남은 감상은 시끄러웠다는 것뿐이었다. 소란을 질색하는 승완은 한바탕 소동 이후 곧바로 카페를 떴었다. 조금 서둘러 물건을 챙기는 바람에 꽃을 깜빡 잊고 카페에 두고 와버렸다. 승완은 집 근처에 와서야 빈손인 걸 알아채고 다시 꽃집에 갔다. 모자를 써서 얼굴이 잘 안 보였을 텐데. 지금은 다른 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 감사합니다. 근데 이미 새로 샀으니 괜찮다면 그냥 가지세요. 버리셔도 되고.”

 

 

 

 승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보이지 않을 것이지만, 일종의 습관이었다. 상대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승완과 꽃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볼일은 끝난 것 같았다. 승완은 머릿속에서 상대의 얼굴을 지웠다. 아직 서 있는 그를 뒤로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 눈이 번쩍 떠졌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주위를 살폈다. 창밖에서 샌 빛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예림은 서서히 잦아드는 울림을 느끼며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아직도 머릿속에 비명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도망치고 싶었다.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악몽에서 깨어난 뒤 밀려오는 기시감은 아직도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다시 잠들긴 글렀다는 생각에 예림은 휴대폰을 찾았다. 새벽 3시였다. SNS와 친구들의 연락을 확인하고 인터넷 서핑을 해도 시간은 그대로였다. 하릴없이 노래만 들었다. 낯익은 멜로디가 예림의 귀를 건드렸다. 일하고 있는 카페의 단골 노래였다. 오늘도 몇 번씩 들을 터였다. 도대체 누구의 취향인지. 예림은 그제 만난 모자가 떠올랐다. 요즘 예림의 관심을 좀먹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어제도 카페에 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주문하고 받는 대화가 끝이었다. 모자는 카운터를 등지고 앉았다. 동그란 뒤통수를 볼 때마다 그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강렬할수록 오래 남는다. 예림은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이 미묘하게 들썩였다. 예림의 책상엔 물이 반쯤 차있는 유리병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여섯 번째 겪는 겨울. 세 계절이 지나도록 비어있던 병에 물이 채워진다. 추위에 상해버린 꽃은 검게 물들었다. 안쪽에서 버티고 있는 작은 보라색 꽃잎이 위태로웠다. 승완은 얼어붙은 꽃을 오랫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 봄은 오지 않는다.

 

 

 

처리했습니다. 금방 비우겠습니다.”

 

 

 

 승완은 감시카메라를 보며 무전에 답했다. 현장의 제 자취를 꼼꼼히 지우고 나뒹굴고 있는 탄피들을 챙겼다. 시체 속의 총알이나 다른 복잡한 절차들은 처리팀에서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장을 둘러본 승완은 막 들어오고 있는 처리팀 직원들에게 목례를 했다. 대부분이 그의 눈을 피했다. 승완의 입가에 조소가 번졌다.

 

 기사에게 인사를 건네며 모자를 쓰고 차에서 내리니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이었다. 가로등만이 골목을 드문드문 비추고 있었다. 날이 춥고 피로가 쌓인 탓에 신경이 예민해졌다. 카페인 생각이 절로 났다.

 

 피곤한 다리를 끌고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느닷없이 어둠 속에서 주먹이 날아왔다. 승완은 반사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몸이 느려져 얼굴을 빗맞았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입 안은 다 터져 피가 가득 고였다. 제대로 들어갔으면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피를 뱉어내고 몸을 일으켜 상체를 벽에 기댔다.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한번 손 댄 사람은 절대 잊지 않는다. 남자는 승완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강한 술 냄새에 승완이 인상을 찌푸렸다.

 

 

 

, , 너 나 알지?”

 

 

 

 남자가 손바닥으로 승완의 머리를 연거푸 때리며 말했다. 시끄러운 새끼. 승완은 눈을 감았다. 남자는 승완의 멱살을 쥐고 욕을 지껄였다.

 

 

 

그 일은 용서할게. 대신 나랑…….”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승완은 그의 팔을 빠르게 풀어내고 허리춤의 총을 꺼내 남자의 머리에 대고 겨누었다.

 

 

 

소란 피우면 곤란해지니까, 적당히 하고 가라.”

이거 뭐냐? ? 쏴 봐, 쏴 봐, 어디. 아이고, 무섭다.”

 

 

 

 총을 다룰 땐 절대 망설이지 않는다. 승완은 바로 방향을 틀어 남자의 어깨를 쐈다. 작은 총성이 골목에 퍼졌다. 남자의 비명이 뒤를 이었다. 머리가 울렸다. 승완은 반동으로 벽에 부딪힌 몸을 가누고 일어나 쓰러져있는 남자의 머리를 발로 툭툭 찼다.

 

 

 

술 마셔서 덜 아플 거야. 좀 닥쳐.”

 

 

 

 아까보다 조용해졌다. 승완은 날붙이를 가져오지 않은 걸 조금 후회했다. 그쪽이 총기보다 더 효율적이다. 이곳에 와서는 몸에 잘 지니고 다니지 않았다.

 

 

 

이제 여기든 카페든 이 동네엔 얼씬도 하지 마.”

 

 

 

 승완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몸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 일은 입단속 잘 하고. 나불대다 걸리면 시체도 못 찾는다.”

 

 

 

 남자는 피를 흘리며 도망갔다. 승완은 바닥에 떨어진 다 식은 탄피를 주웠다. 건너편 벽에 총알이 박혀있었다. 화력이 좋은 총이 아니라 멀리서 쏘면 총알이 몸에 박힐 가능성이 컸다. 박힌 총알을 조사하게 되면 승완이 곤경에 처할 수 있었다. 총알이 최대한 남자를 뚫을 수 있게 총을 겨눴다. 결과는 승완이 계산한 대로였다.

 

 긴장이 풀리니 피로가 몰려왔다. 경찰을 마주하기 껄끄러워 모든 일을 조용히 해결하려고 해왔는데. 머릿속 한 편에 날붙이를 적어 놨다. 다시 주저앉아 차가운 벽에 기댔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저기요.”

저기요. , . 내가 왜…….”

뭐야, 이거 피 아냐?”

 

 

 

 승완은 눈을 번쩍 떴다. 코앞에 있던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카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 놀래라. 아파 죽겠네. 얼굴 어디 다쳤어요?”

아뇨, 괜찮아요.”

빨리 병원 가 봐요. , 피 징그러워.”

 

 

 

 승완은 아까 맞았을 때 날아간 모자를 주워 푹 눌러썼다. 이런 데서 자면 얼어 죽어요. 카페 아르바이트생은 다시 제 갈 길을 가는 모양이었다.

 

 

 

저기.”

 

 

 

 뒤를 돌아본 그의 얼굴엔 별 다른 표정이 없었다. 승완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승완은 또 다시 미끄러운 길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남자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와 그에게 달려들었다. 승완은 그 얼굴을 터뜨릴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고통으로 얼룩진 남자의 얼굴은 흐릿해지고, 기억 속 배경이 색을 입어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손에 땀이 찼다.

 

 

 

조심해요.”

 

 

 

 그는 승완의 말에 씩 웃고는 말없이 걸어갔다. 웃지만 말고 말을 해요. , 미안, 귀여워서. 승완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꾹꾹 눌러 그린 건, 지워도 자국이 남는다.

 

 

 

 가장 최근 행적을 찾았습니다. 2년 전 일본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드디어 진전이 있네요.

 

 

 

 길에서 만난 이후 모자는 몇 차례 카페에 들렀다. 예림은 그를 관찰했다. 그는 주로 사람이 없는 한가한 시간대에 왔다. 음료는 테이크아웃을 하거나, 받아들고 구석진 곳에 앉았다. 그리고 매번 꽃을 사왔다. 예림은 그 꽃이 보일 때마다 시선을 돌렸다.

 

 다친 건 괜찮아진 듯 했다. 그날 예림은 모자의 맨얼굴을 처음 봤다. 저와 비슷한 체구에 익숙한 분위기, 낯익은 옆모습이 아니었다면 알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앞머리에 반쯤 가려진 선한 눈매가 안 어울리는 듯 어울렸다. 정신을 차린 그 사람과 눈을 마주했을 때, 예림은 그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저기, 이름이 뭐예요?”

 

 

 

 모자가 멈칫하는 게 보였다. 카페에서 주문할 때 이름이 필요한가요. 평소처럼 차분하고 친절했지만 어딘가 서늘함이 느껴졌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예림은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 본 날, 그 양아치에게 말하던 목소리였다. 이름만 물어봤을 뿐인데, 예림은 왠지 그 남자와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가 생판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 않나. 오기가 생겼다.

 

 

 

우리 대화도 몇 번 하고 이런저런 일 있었잖아요. 친하게 지내자는 건 아니고 그냥 예의상 물어본 거예요.”

…….”

김예림. 싫으면 말 안 해주셔도…….”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요.”

 

 

 

 그는 여전히 냉한 친절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리에 앉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예림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작게 한숨을 쉴 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차 문을 열자마자 얼굴을 때리는 찬바람에 승완은 목을 움츠렸다. 껴입은 외투를 바짝 여몄다. 밤이 깊었다. 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기온은 그리 낮지 않았다. 아직 남아있는 얼음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길 곳곳이 반짝거렸다. 피로가 덜한 날이면, 승완은 인적이 끊긴 겨울의 새벽을 오래 걸었다. 낮과는 또 다른 풍경을 둘러보거나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승완의 낡은 즐거움이었다.


 바람이 그치고 공기마저 멈춘 새벽의 정적을 깨는 건 승완의 발걸음만이 아니었다. 골목 끝에서 누군가 마주 오고 있었다. 승완은 경계를 늦췄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일대일은 승산이 있었다. 가로등이 그의 모습을 비추는 순간, 승완은 패배를 직감했다.

 

 

 

우리 진짜 자주 만나네요.” 우리 진짜 자주 본다.

 

 

 

 운명인가 봐요. 승완은 눈을 감았다.

 

 

 

이거 입어요.”

 

 

 

 예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옷을 받아들었다. 추워보여서. 예림은 말없이 옷을 걸쳤다.

 

 

 

생각보다 착하네요.”

…….”

 

 

 

 저번엔 인성 파탄 난 줄. 예림이 크게 중얼거렸다. 승완은 걸음을 빨리 했다. , 같이 가요! 무서운데! 손잡을래요. ……고마워.

 

 

 

근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저번에도 그렇고. 착하다는 말 취소한다며 구시렁거리고 있던 예림이 땅을 보며 걸었다.

 

 

 

자다가 깨면 시간이 잘 안 가더라고요.”

 

 

 

 예림은 악몽을 꾼다고 했다. 어둠 속에 갇혀 누군가 죽고 죽이는 소리만 듣게 되는 꿈. 다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도 함께였다. 꿈의 틀만 바뀔 뿐, 결과는 언제나 똑같았다. 예전보다 줄었어도 사흘에 한번은 자다가 깨버렸다. 방에 있으면 꿈이 저를 삼킬 것 같아서 뛰쳐나왔다고 말하는 예림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겁에 질려 있었다.

 

 

 

친구들한테도 말한 적 없는 건데, 잘 모르는 사람이니까 얘기한 거예요.”

 

 

 

 승완은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그쪽은? 뭐하고 있었어요? 승완은 고개를 돌렸다. 예림은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일하고 왔어요.”

그렇구나. 집에 안 가요?”

……걷는 걸 좋아해서.”

그럼 해 뜰 때까지 걸어요. 심심하니까.” 우리 산책 갈까? 좋아요, 웬일이에요. 그냥, 네가 좋아하잖아. 귀여워요. 뭐야, 뜬금없이.

 

 

 

 예림이 작게 노래를 틀었다. 노래는 쥐죽은 듯 고요한 공간을 잔잔하게 헤엄쳐 다녔다. 분위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데려다줄까요.”

무슨, 됐어요. 일하고 왔다면서.”

……조심해요.”

그쪽이나 조심해요.”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요. , 너도 조심해서 가.

 

 

 

 별로 피곤하지 않았지만 속에 카페인을 들이붓고 싶었다. 아무래도 중독된 것 같다고, 승완은 생각했다.

 

 

 

 밀입국 쪽을 캐보니 1년 전 부산입니다. 일본에서 목격된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남자 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가족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 이제 줄줄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모자를 우연히 만나는 일은 예림에게 일상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으며 대화를 하거나, 실없는 농담을 하며 웃거나(주로 예림이 던지고 혼자 웃는 식이었다.), 노래를 틀어놓고 생각에 잠겼다. 예림이 쌓아둔 고민들을 하나씩 털어놓으면, 모자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는 제 얘기를 잘 하는 법이 없었지만, 예림의 잡다한 물음엔 곧잘 대답해주곤 했다.

 

 예림은 일이 있는 날 낮에는 모자가 카페에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잠에서 깨어 혼자 걸을 때면 그의 잔잔한 목소리나 익숙한 옆모습이 생각났다. 잠을 미루며 노래를 듣다 새벽이 되면 그가 걸어 다니고 있을 모습이 떠올랐다. 방아쇠를 당긴 듯 빠르게 연쇄적으로 작용하는 생각을 예림은 따라잡을 수 없었다. 새로운 기억이 담긴 공간은 마음이라는 투명한 질량을 따라 휘어지고, 새로운 의미가 생긴 시간은 축을 벗어나 빛의 속도로 상대에게 달려간다.

 

 

 

여기요. 저번 주에 준다는 걸 볼 때마다 까먹었네요.”

고마워요.”

뭐가 고마워요. 원래 그쪽 건데.”

 

 

 

 예림은 실소했다. 무서운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언제부터인지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물렁하게 반응한다. 싫지는 않았다.

 

 

 

이거 입어요.”

 

 

 

 오늘 최저 기온, 즉 새벽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고 했지만 예림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 아니었다. 어깨 위로 옷이 걸쳐졌다. 모자는 본격적으로 겨울이 되자 지금처럼 꼭 겉옷을 겹겹이 입고 와선 예림에게 하나씩 빌려줬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예림은 군말 없이 받아 입었다. 옷에서 그의 향이 났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말을 내뱉은 순간 예림의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예림은 그의 고개가 이쪽을 향하는 걸 보고 있었다. 여전히 모자에 가린 눈은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이름은 아니고, 그 꽃……, 있잖아요.”

 

 

 

 다시 뒤틀렸다. 꼬여대는 그것을 꽉 붙잡고 말을 이었다.

 

 

 

그건 왜 사는 거예요?”

 

 

 

 모자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예림은 제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속에서 뒤틀리고 있던 무언가는 이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언제 다시 요동칠지 몰랐다.

 

 

 

좋아해서요.”

?”

 

 

 

 예림은 제 입을 막았다. 이번엔 소용돌이쳤다. 빨려 들어가는 건, 잡을 수가 없었다.

 

 

 

누가 좋아해서요.”

 

 

 

 승완은 먼 곳을 바라봤다. 제 목소리가 얼어붙어 작은 얼음 알갱이가 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누가 좋아하는데요? 애인?”

 

 

 

 예림은 땅을 보며 걷고 있었다. 목소리가 흔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완은 눈을 감았다.

 

 

 

떠난 사람이요.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찾질 못했네요. 승완은 다시 먼 허공을 응시했다. 그 사람이 제 품에서 죽어간 날을 끝으로, 승완의 세계는 뒤집혔다. 이름은 죽었고, 그 자리엔 가시가 돋았다. 맞아요, 아빠, 아니, 회장님. 예외를 두게 되면 조직의 기강이 무너질 겁니다. ……회사는 절대 경찰과 협상하지 않으며, 밀고할 시 끝까지 쫓아가 일가를 몰살한다. , 알겠습니다.

 

 

 

아직도 약속을 못 지켜서…….”

…….”

 

 

 

 매일 죽어가는 꽃을 보며 승완은 가시를 날카롭게 다듬었다. 피가 엉겨 붙은 가시가 못 뚫을 건 아무것도 없어보였다. 승완은 예림에게 시선을 돌렸다. 예림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승완은 비가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짙은 푸른색의 하늘엔 구름 몇 점만이 떠있었다.

 

 

 

표정 풀어요. 괜히 물어봤네요. 미안해요.”

 

 

 

 다시 본 예림의 얼굴엔 멋쩍은 웃음이 서려 있었다. 승완은 말없이 예림을 바라봤다. 형체가 없는 건 관통할 수 없다. 다만 그것에 흡수될 뿐이다.

 

 

 

근데 사람이 그렇게 착하게 살면 안돼요.”

 

 

 

 그냥,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거 있잖아요. 싫을 땐 싫다고 하고, 화도 좀 내고. 애인도 있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비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저 구름 속의 비는 얼마나 녹았을까. 허공에 떠있던 과거들이 조금씩 색을 잃었다. 승완의 머릿속을 맴돌던 소리도 점차 작아졌다. 승완은 모자를 벗었다.

 

 

 

잘 모르지만, 약속을 지키려고 그쪽이 노력한 걸 알면 그 사람도 이해하지 않을까요. 당신이라면 그럴 것 같아서.”

 

 

 

 신발만 보고 있던 예림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시선이 마주쳤다. 비가 퍼붓는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탈색된 과거들 속에서, 제 앞의 한 사람만이 선명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재 거주지 찾았습니다. 바로 전송하겠습니다.

 

 

 

 한동안 예림은 모자를 볼 수 없었다. 처음엔 일이 바쁜가 싶었지만 그는 카페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지만 막상 닥치니 기분이 엉망이었다. 서운하고, 허전했다. 그 사람이 뭐라고 일상에 집중을 못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그러다가도 다쳤을 때를 생각하면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예림은 모자와 새벽을 보내게 되고 나서부터 악몽을 잘 꾸지 않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오늘은 깨고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예림은 습관처럼 집을 나섰다. 별 기대는 없었다. 질주하는 생각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마음이 편해지긴 했다.

 

 

 

! 저기요!”

…….”

 

 

 

 예림은 제가 헛것을 본 줄 알았다. 처음 형체를 봤을 땐 겁먹었지만, 계속 보니 익숙한 그 사람이었다. 예림은 급하게 걸어갔다. 그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잘 지냈어요?”

 

 

 

 예림은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이 뒤죽박죽이라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모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해 떠요. 같이 가요, 집에.”

 

 

 

 예림은 거절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본 모자는 한순간에 딱딱해졌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 같았다. 단호한 옆모습이 서늘했다. 위태롭던 속이 결국 흐트러졌다. 다시 정리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음엔 꼭 붙잡을 거라고, 예림은 마음먹었다.

 

 

 

 과거에 비춰진 허상의 잔재인 줄 알았던 건 사실 실상(實像)이었다. 제가 실상을 좇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승완은 두려웠다. 도망치진 않았지만 마주하지도 않았다.

 

 승완의 생활은 달라진 게 없었다. 매일 꽃을 사고, 일을 하고, 잠을 잤다. 일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향했고, 커피는 집에서 내려 마셨다. 일이 없는 날은 자거나 누워있었다. 지도와 신문 기사, 사진들이 잔뜩 붙어 있는 방을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예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날, 둘은 예림의 집까지 같이 걸어갔다. 승완은 예림이 입을 여는 순간 제가 그동안 세운 벽이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다행히 예림은 말이 없었다. 빨리 선을 그어야 했다. 나란히 달리던 마음이 선을 추월해버리면, 선 건너로 달려가 걷잡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대어입니다. 당신도 아는 숙적이죠. 우선 처자식부터 잡고 가자고 하십니다.

……저는 쥐새끼 잡을 때 합류하겠습니다.

 

 

 

 간부 중 한명이 급히 승완과 접촉한 이유였다. 평소엔 간부까지 연락이 닿을 일이 없었다. 내부 직원들에게 전달 받은 일을 수행할 뿐이었다. 승완은 무언가의 끝이 다가옴을 직감했다.

 

 수십 번을 읽은 파일은 변함이 없었다. 회장의 가족을 노출시켜 승완의 애인을 죽게 한 밀고자. 등잔 밑이 어두웠다. 가족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지금까지 자세한 정보는 없었다. 승완은 갑작스러운 희소식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가족의 위치를 알아낸 순간, 쥐새끼를 잡을 제일 쉬운 방법은 쥐구멍에 불을 질러 내모는 것이었다.

 

 승완은 집에 오는 내내 멍하니 있었다. 감정이 파도치다가 때로는 용솟음쳤다.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검은 꽃잎을 보며, 밀도에 따라 가라앉는 감정을 정리했다.

 

 다음날 승완은 카페에 갔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예림을 보고 싶었다. 한적한 매장을 둘러보다 주문을 하러 다가간 카운터에는 예림과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서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의 의아한 표정을 포착한 승완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악몽을 꾼다고 했다. 가족들이 미처 도망가기 전에,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저를 숨겨놓은 캐비닛 속에서 떨고 있었다. 깨지는 소리와 총 소리, 칼로 찌르는 소리,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굴러왔다. 아이는 숨죽여 울었다. 어머니와 가족들을 잃고 아버지와 함께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죽은 듯이 살았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았고, 지켜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색이 없는 세상을 처음 물들인 건 보라색이었다. 보라색을 잃고 흑백이 되어버린 승완을 다시 칠한 건 보라색을 닮은 분홍색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승완은 한파에 금세 시들어버린 꽃을 다듬었다. 얼어붙은 눈이 내렸다.
















'Win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웬옐]출제오류  (0) 2018.02.24
[웬옐]접촉  (0) 2018.02.24
[웬조이]안녕 나의 산타  (0) 2018.02.24
[웬조이]수취인 불명  (0) 2018.02.24
[웬조이]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0) 2018.02.24